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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래픽 디자인이 전시장 안에 있어야 하는가? 목적과 기능에 충실한 물건을 굳이 그것이 뿌리내리고 있는 맥락에서 도려내어 전시장 조명 아래서 들여다보아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디자인’이라는 개념을 고안한 지역에서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지금 한국에서 디자인을 전시하려는 시도를 하고자 한다면 이 질문을 의식하지 않을 수는 없다. 디자인 행위의 산물을 ‘한눈에 이해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것’과 ‘이용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여전히 디자이너가 의무를 방기 했을 때에나 생기는 있어서는 안 될 일이고, 물건 너머에 존재하는 사람의 자아를 마주하는 것은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그다지 달가운 일이 아니다.
물론 이러한 질문 따위는 신경 쓰지 않고 디자이너의 창조 기술로서 제작한 물건을 전시하는 일은 꾸준히 있었다. 그러나 일시적으로 성사되었던 이벤트의 대부분은 분야의 유산으로 퇴적되기는커녕 공동의 기억으로 남는 것에도 성공하지 못했다. 밀도 높은 일상세계에서 텅 빈 하얀 방으로 튕겨진 물건들은 서둘러 상업적 가치를 대신해 자신의 존재를 승인해줄 근거로서 사회적·정치적 대의를 발견해냈지만, 전시장이 그러한 발언을 하기에 적합한 공간인지는 전시장의 원주민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분분한 듯하다. 한편 보다 예술적 목적을 가진 작업들, 예컨대 순수한 미적 체험을 통한 정서적 환기를 노린 작품이라고 해도 전시장 안의 디자인이라는 상황을 뒷받침해줄 그래픽 디자인만의 맥락을 구축하지도, 예술의 맥락 안에 자리잡지도 못한 채 작가 개인의 자의식 세계 속에 머물렀다.
그런 의미에서 한글이라는 주제의 발견은 여러모로 전시용 디자인을 위한 구원이 되었다고 할 만하다. 추상적 층위에서의 조형이 기능의 문제와 직결되는 문자의 특성은 그래픽 디자인의 직능 분야와 폭넓게 겹쳐지고, 한글은 자본주의적 소비재인 여타의 디자인 산물과 다르게 한국어 화자 전체를 사용자로 거느린다. 이것은 앞 문단에서 말한 경우의 문제점을 보완하는 단서가 된다. 한글을 소재로 삼는 한 외부로부터 사회적 대의와 같은 목적을 빌려오지 않고도 어느 정도 유의미한 작품을 만들 수 있고, 설사 디자이너 내면에 잠재된 아름다움에의 열정을 마음껏 분출하더라도 관객과 최소한의 의사소통은 가능해진다. 요컨대 신생 분야로서 그래픽 디자인이 지닌 한계, 즉 작품 해석과 평가를 위한 맥락의 부재를 한글이라는 소재가 지닌 역사와 대중성, 민족주의적 요구가 대신 채워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처럼 복잡다단한 목적과 이해와 관계의 더께를 긁어냈을 때 그래픽 디자인 그 자신의 것으로서 마지막까지 제거되지 않고 남을 것은 무엇일까. 마치 근대 여명기 철학자처럼, 두 눈을 감고 디자인의 내부를 향해 밀고 간다면 결국 가닿게 되는 것은 그래픽 디자인이 시각적 형식을 결정하는 행위라는 새삼스러운 사실이다. 부재했던 맥락이 시간의 흐름과 함께 조금씩 쌓이고, 이윽고 자기 자신과 자신의 일에 대한 예민한 자의식을 지닌 세대가 등장했을 때, 그들이 다른 무엇이 아닌 형식 결정에 있어서의 자유를 기준으로 활동 반경의 조직한 것은 그런 점에서 당연하다. 디자인으로써 사회적 정의와 거대한 이상 실현에 기여한다는 것은 헛된 거짓이고, 생계유지와 자아실현의 양 극단 사이에서 힘겨운 곡예를 벌이기보다 자신의 취향과 미감의 산물이 제품으로서 유통될 수 있는 특수한 세계를 발견하고 선택해서 일을 한다. 외연을 넓히기 위해 통제 불가능한 외부인과 손을 잡느니 SNS를 거점으로 모인 친구들과 출판과 교육, 비평 활동을 벌여 소비자와 미래의 동료를 조금씩 확보해나간다. 이 과정을 강하게 추동하는 것은 앞선 세대가 추구했던 가치와 태도에 대한 반동과 냉소의 에너지였다.
Graphic Design 2018
직전의 시간들이 끝나고 난 지금 2018년은 불안과 무력감이 공기 중을 채우고 있는 시간이다. 일단 모든 사회지표들이 현재의 2, 30대 사람들에게 당신들은 결코 성장과 성취와 상실로 균형 잡힌 노화 과정을 밟을 수 없을 것이며 미완성 상태의 기약 없는 지속이 남은 삶의 전부일 것이라는 불길한 예언을 끊임없이 발신하고 있다. 한편 그래픽 디자인의 경우 «그래픽 디자인, 2005~2015, 서울» 전시로 표상되는, 이전의 어느 시기 보다도 그래픽 디자이너의 자율성이 승리를 거둔 듯 보였던 실천 모델이 2016년을 기점으로 대두된 페미니즘 물결로 인해 유효하지 않게 되었다. 대의명분에 대한 긍정이 손쉽게 전현대적 태도로 간주되고, 외부 세계로부터 눈을 감고 이미 갖고 있는 능력과 조건을 최적의 효율로 굴려 성과를 만들어내는 것이 곧바로 실용이 될 때, 그 시스템은 윤리적 오류에 취약할 수밖에 없다. 아무튼 실로 세대적 단절이라고 부를만한 사건의 발생은 이전 세대를 갱신할 새로운 활동 형태에 대한 열망을 불러일으켰지만 이제 막 생겨난 동력이 가시적 성과로 전환되기 위해서는 더 충분한 시간이 필요할 듯하다.
한편 «ORGD»의 또 다른 기획자는 2018년의 그래픽 디자인이 처한 상황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미니멀리즘의 스킨을 씌운 뽀송뽀송한 장인정신과 건조한 농담을 통해 ‘복잡한 단순화’를 성취했던 지난 10여 년 간의 그래픽 디자인 경향은, 마치 지난 10여 년간의 운영 기간을 거쳐 2016년 1월 4일 휴지기를 선언한 매니스터프처럼, 서서히 끝나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빈자리를 채운 새로운 풍경을 확정적으로 묘사하는 것은 — 만약 그 설명이 몇 년 후 완전히 그릇된 것이라 판단된다면 그 또한 흥미롭겠지만 — 지나치게 성실하게 느껴집니다.
2018년의 그래픽 디자인에는 어떠한 구성요소들이 있을지를 생각해봅니다. 그것은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를 중심으로 트렌드가 형성되는 현재의 매체 환경이 지닌 특성, 즉 핀터레스트 키워드들과 인스타그램 디자인 큐레이션 계정들을 통해 초고속 자극-반응이 이루어질 수밖에 없는 매체적 특성을 통해 설명될 수도 있겠습니다. 또한 지난 시간의 그래픽 디자인 결과물들의 역사적 적층이 이루어진 토대 위에 새로운 세대가 등장할만한 충분한 시간이 흘러서, 즉 ‘힙스터 농담과 프로그래밍을 동시에 수행할 수 있는 세대’가 비로소 등장하여 마음껏 CSS를 만지고 C4D를 돌리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지요. 혹은 이에 더해, 이전까지는 연동되는 바가 특별히 관찰되지 않았던 패션 분야와의 연계가 몇 가지 방식을 통해 우연히 성취된 것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고 설명할 수도 있겠습니다. 이를테면 (리카르도 티시 시절의) 지방시 등에서 몇 년 전에 등장했던 고딕-힙합 혹은 발렌시아가를 위시한 고프코어(gorpcore)식 마구잡이 매칭 또는 독특한 경로로 스타가 되어버린 버질 아블로를 재미있게 쳐다보는 동시에, 그래픽 디자이너 몇 명이 참여한 5만 원짜리 티셔츠 같은 것을 텀블벅에서 밀어주는 식이죠.
그러나 각 관점의 비교적 균등한 글자 수를 통해서도 유추하실 수 있듯이, 어느 한구석에 결정적 초점을 맞추는 것은 저의 몫이 아니어도 됩니다. 게다가 저의 관심사는 이런 초점회피의 산뜻한 비겁함보다 큽니다. 즉, 무언가를 판단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 판단하지 않음을 어떻게 전시 그 자체에 들이부을 수 있을까요.
— 배민기, «전시1(Test)을 위한 서문을 위한 원자재» 중에서
Test & Task
흩어진 조각들을 그러모아 전체를 가늠하려 하든 부서져있는 상태를 받아들인 채 우회로를 모색하든 어떠한 개운한 결론도 희미한 전망도 얻을 수 없다면, 그렇다고 사회에서 설정해놓은 그래픽 디자이너의 역할과 불화하는 자신에게 포기를 납득시키는 것도 불가능하다면, 도대체 닥쳐오는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까. «Open Recent Graphic Design»은 일단 이전 시간을 거쳐오며 손에 남은 잘하는 것과 부족한 것, 얻은 것과 잃은 것에 대한 대차대조표를 각자의 머릿속에서 그려보면서, 도출된 결괏값들이 교차하는 지점에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는 틀을 만들려고 한다. 몇 백 년도 10년도 아닌 거의 현재와 다를 바 없는 시간을 그때그때 잘라내어 보는 이 초단기 회고전은 앞으로 나아갈 힘은 자신과 과거를 되돌아보면서 생긴다는 평범한 진리를 긍정한다. 또한 «ORGD»는 잘라낸 단면을 보는 것만큼이나 단면의 모양새를 구실 삼아 여럿이 함께 — 절망감의 공유가 아닌 — 생산적인 영향을 주고받는 계기가 되기를 희망한다. 비평, 한국 그래픽 디자인계에 제대로 있어본 적도 없이 오염부터 되어버린 이 불쌍한 단어 본래의 효용까지 부정할 수는 없는 일이다.
일단 여기까지가 이 행사가 충실하고자 하는 목적과 기능이다. 이를 달성하는데 적합하기만 하다면 점유할 공간이 전시장인지 아닌지는 사실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